
저는 그날 리프트를 타고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제 카빙 턴 실력에 꽤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친구들과 첫 런을 시작한 직후, 그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났고 대신 뼈아픈 각성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라이딩은 제가 지금껏 경험한 그 어떤 스피드보다 빨랐고, 고글에 차오르는 김 서림 속에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까지 겹치며 저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슬로프를 내려와야 했습니다. 이 경험은 제게 스노보드의 진짜 실력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안전이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온몸으로 깨닫게 해준 충격적인 하루였습니다.
압도적인 일본 라이더의 스피드와 카빙 기술
저는 평소 슬라이딩 턴을 넘어 엣지를 세우는 카빙 턴(Carving Turn)을 연습해왔습니다. 여기서 카빙 턴이란 보드의 엣지를 눈 표면에 깊게 새겨 넣으며 날카롭게 방향을 바꾸는 기술로, 슬라이딩 턴보다 훨씬 높은 속도와 정확한 하체 컨트롤을 요구합니다. 다운 프레스(Down Press)를 주기 위한 업다운 동작을 반복하며 하체 근력도 꾸준히 단련해왔기에, 저는 나름대로 중급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슬로프 정상에서 바인딩을 채우고 일본 친구들과 함께 첫 런을 시작하는 순간, 제 알량한 자만심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가파른 경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보드 데크를 슬로프 바닥에 완전히 눕히다시피 하며 엄청난 원심력을 이겨냈습니다. 엣지가 차가운 눈밭을 날카롭게 찢으며 뿜어내는 눈보라와 경쾌한 마찰음만이 그들의 궤적을 증명했고, 폴라인(Fall Line, 경사면에서 물체가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최단 경로)을 향해 거침없이 데크를 던지며 가속을 붙이는 뒷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폴라인을 따라 직진하는 라이딩은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높은 난이도를 요구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그 스피드를 따라잡기 위해 허벅지가 터질 듯이 강하게 프레스를 가하고, 평소보다 무리하게 턴의 반경을 줄여가며 데크를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거리는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벌어지기만 했고, 밸런스가 무너진 제 데크는 슬로프의 요철을 이기지 못하고 덜덜거리며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려 했습니다. 국제스키연맹(FIS)의 스키장 안전 지침에 따르면, 라이더는 자신의 기술 수준에 맞는 속도를 유지해야 하며 타인에게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선에서 주행해야 합니다(출처: FIS).
고글 김서림과 시야 차단의 공포, 그리고 안전의식의 부재
설상가상으로 오버페이스를 하며 극도의 긴장 속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땀과 거친 숨결은 고글 렌즈 안쪽에 지독한 김 서림을 만들어냈습니다. 차가운 외부 공기와 후끈하게 달아오른 고글 내부의 엄청난 온도 차이로 인해 렌즈는 순식간에 하얀 안개로 뒤덮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스노보더들 사이에서는 '화이트아웃(Whiteout)'이라고 부르는데,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어 슬로프의 지형지물을 전혀 인지할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야 상실의 공포는 실력의 격차보다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슬로프 바닥에 교묘하게 얼어붙은 흉악한 아이스반이나 깊게 파인 감자밭 같은 범프(Bump, 슬로프에 형성된 불규칙한 돌기)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엄청난 속도를 제어하려다 보니, 하체의 텐션은 완전히 무너졌고 여러 번 튕겨 나갈 뻔한 아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슬로프 가장자리에 멈춰 서서 김 서린 렌즈를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때, 뼈저린 패배감과 좌절감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좌절감은 제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학구열과 승부욕을 맹렬하게 불태우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대한스키지도자연맹의 안전교육 자료에 따르면, 스노보드 부상의 약 40%는 시야 확보 불량과 과속에서 비롯되며, 특히 초·중급자의 무리한 속도 추종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출처: 대한스키지도자연맹). 어설프게 남의 스피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극한의 경사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체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데크의 탄성을 내 수족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진짜 실력'의 향상이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은, 제 스노보드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충격과 뼈아픈 성장의 라이딩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제 행동은 스노보더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 수칙을 철저하게 망각한 매우 무모한 객기였습니다. 스노보드는 오롯이 자신의 신체 능력과 엣지 컨트롤 기술의 한계치 내에서 속도를 제어해야 하는 생존 스포츠입니다. 본인의 턴 궤적과 브레이킹 능력을 무시한 채 타인의 오버페이스에 휩쓸려 무리하게 가속을 강행하게 되면,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데크를 제때 제동하지 못해 펜스에 크게 충돌하거나 슬로프 아래의 타인과 부딪히는 끔찍한 대형 사고로 직결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글에 김이 서려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라이딩을 멈추지 않고 강행했다는 점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고속으로 보드를 타는 것은 눈을 꽉 감고 고속도로 한복판을 역주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시야가 차단되면 슬로프의 미세한 굴곡을 인지할 수 없어 역엣지(Reverse Edge, 의도하지 않게 반대쪽 엣지가 걸려 넘어지는 현상)에 걸리게 되며, 이는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나 뇌진탕 등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초래합니다. 아무리 일행을 놓치기 싫고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고글의 시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다면 즉각 슬로프 가장자리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여 렌즈를 닦아내고 완벽한 시야를 확보해야만 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제가 배운 핵심 안전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의 현재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무리한 속도 추종을 절대 하지 않는다
- 고글 김 서림 등 시야 확보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안전한 곳에 정지하여 조치를 취한다
- 타인의 라이딩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 슬로프의 컨디션과 자신의 체력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라이딩한다
결론
겉멋과 얄팍한 승부욕을 버리고 자신의 현재 실력을 뼈저리게, 그리고 가장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보수적인 안전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저는 이날의 경험을 통해 진짜 실력이란 타인의 스피드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 보드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안전하게 슬로프를 내려올 수 있는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기본기를 다지며,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스노보더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