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시즌 개장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막상 슬로프에 서니 제 몸이 8개월 전 그 감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1월 21일 용평 리조트의 야간 개장은 매년 국내 스노보더들의 긴 갈증을 해소해주는 신호탄입니다. 하얀 설원 위에 데크를 올리는 순간, 비시즌 동안 억눌렀던 라이딩 본능이 폭발하지만 현실은 머릿속 환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옐로우와 핑크 슬로프만 열린 초반 설질 속에서 화려한 트릭을 시도하다 보면, 우리는 시즌 첫날의 진짜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시즌 개장, 왜 모두가 첫날에 달려가는 걸까요?
여러분도 혹시 "개장했다"는 소식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 적 있으신가요? 저는 원래 다음 주 평일에 여유롭게 보딩을 계획했었는데, 용평 리조트의 야간 개장 공지를 보자마자 오후 3시 44분에 급하게 짐을 싸서 출발했습니다. 오후 6시에 출발해 약 7시경 스키장에 도착했고, 리프트권을 받자마자 바로 슬로프로 향했습니다.
이 시기 슬로프는 아직 완벽한 한겨울의 강추위가 찾아오지 않아 눈 상태가 다소 무르고 푹푹 파이는 슬러시(slush) 같은 설질을 보입니다. 여기서 슬러시란 눈이 녹아 물기를 머금은 상태로, 엣지가 제대로 박히지 않고 미끄러지기 쉬운 조건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옐로우와 핑크 슬로프만 개장한 상황에서 슬로프 개수나 눈 상태보다 '개장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간 조명 아래 펼쳐진 설원을 바라보며 바인딩의 라쳇을 단단하게 조일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서늘한 감각은 세상 어떤 자극보다 강렬합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순간, 비시즌 8개월 동안 방구석에서 수만 번 상상했던 완벽한 라이딩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 기대와 달리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습니다.
트릭 시도, 머릿속 환상과 슬로프 위 현실의 괴리
비시즌 동안 우리는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프로 보더가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널리(Nollie), 앤디(Andy), 프론트사이드 스핀, 백사이드 스핀 같은 화려한 그라운드 트릭(ground trick)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상상을 수없이 했습니다. 여기서 그라운드 트릭이란 점프대나 레일 없이 평지 슬로프에서 데크를 조작해 회전이나 프레스 동작을 수행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슬로프에 올라가 트릭을 시도하니, 제 몸은 8개월간 잊고 있던 미세한 균형 감각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힘차게 팝(pop)을 치며 뛰어오르려 했지만, 하체 근육은 엇박자를 냈고 엣지는 무른 눈을 파고들지 못한 채 허무하게 미끄러졌습니다. 팝이란 데크의 노즈나 테일을 눌러 반발력으로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동작입니다. 저는 첫날부터 널리, 앤디 등을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몇 번 시도 끝에 앤디는 나쁘지 않게 성공했고, 이어서 프론트와 백 기술을 차례로 시도했습니다. 특히 백사이드 스핀이 무서웠지만 한 번은 이쁘게 성공해서 다시 한 번 더 시도했습니다. 콤보 트릭도 짤막하게 이어가 봤지만, 체력(가스)이 빠르게 떨어지면서 레이트(late) 기술 시도가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시즌 초반이라 연습 후 두 번 정도만 타고 촬영했는데, 제 경험상 이 정도면 몸을 풀기에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트릭을 시도하면 부상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습니다(출처: 대한스키지도자연맹).
안전 의식, 화려한 영상 뒤에 숨겨진 위험 신호
여러분은 시즌 첫날 어떤 마음가짐으로 슬로프에 오르시나요? 저는 솔직히 초반에는 "기본기부터 다지자"고 다짐하면서도, 막상 슬로프에 서면 화려한 트릭을 시도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시즌 초반 슬로프 사고율은 다른 시기보다 현저히 높습니다. 국내 겨울 스포츠 안전 통계에 따르면, 개장 직후 2주간 부상 발생률이 시즌 평균보다 약 40% 높게 나타납니다(출처: 대한스포츠의학회).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시즌 초반 주의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8개월간 굳어 있던 근육과 관절이 갑작스러운 고강도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함
- 슬러시 설질로 인해 엣지 컨트롤이 평소보다 어려움
- 화려한 영상을 보고 자극받아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경향
저 역시 영상 촬영을 의식하며 무리하게 백사이드 스핀을 반복 시도했는데, 뒤늦게 손목 보호대조차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ACL(전방십자인대) 파열이나 손목 골절 같은 심각한 부상은 대부분 이런 순간에 발생합니다. ACL이란 무릎 관절 내부에서 경골이 앞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인대로, 스노보드에서 흔히 다치는 부위입니다.
진정으로 시즌 초반의 기본기를 중시한다면, 화려한 트릭 영상보다는 깊숙한 업다운(up-down) 자세, 정확한 시선 처리, 양발에 균등하게 프레스를 주며 안정적으로 슬라이딩 턴을 이어가는 진짜 '기본기' 훈련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업다운이란 무릎과 허리를 이용해 상하 움직임을 주며 턴의 리듬을 만드는 기초 기술입니다. 저는 이번 시즌부터는 화려함보다 안전을 우선시하며, 보호 장비를 철저히 갖추고 자신의 실력과 설질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보수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결론
11월의 야간 개장은 분명 설렙니다. 하지만 그 설렘 뒤에는 8개월간 잊고 있던 감각을 깨우고, 데크와 내 몸의 무게 중심을 다시 완벽하게 동기화시키는 조심스러운 의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즌 시작이니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기본부터 다시 다지면서, 앞으로 펼쳐질 긴 시즌을 안전하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도 첫 라이딩에서는 화려한 트릭보다 자신의 몸 상태와 설질을 먼저 확인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권합니다.